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뮐러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시골 경찰관의 아들로 [[뮌헨]]에서 태어난 뮐러는 [[국민학교]]를 졸업한 후 [[1914년]]부터 [[바이에른]]의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다가 제 1차 세계대전시기 서부전선에서 육군 정찰기 조종사로 활동하며 1급 철십자 훈장과 바이에른 전공십자훈을 받았다. 독일 패전 후에는 바이에른 주 경찰본부에서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데모를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다. 한번은 뮌헨의 공산주의자들이 인질극 도중 인질을 쏴죽이는걸 목격한 그는 평생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했다고 한다. 1929년부터 바이에른 경찰서 기관이 된 뮐러는 이후 경찰간부 일을 하기 시작했다. [[바이마르 공화국]] 시절, 나치당원은 아니었지만 뮌헨경찰의 정치부를 운영하던 관계상, [[하인리히 힘러]]와 [[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]]를 포함하여 나치당의 많은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다. 뮐러는 평소 정치에는 무관심하며 맡은 일에만 충실했기에 역사학자들은 그가 전형적인 공무원이라고 보기도 한다. 그러다가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친위대 보안부장이 된 하이드리히는 소련에 대해 잘 알며, 경찰에서 실력자인 뮐러와 그의 부하들을 포섭하여 1934년에 친위대에 가입시켰다. 친위대 파일에 기록된 뮐러의 성격에 관한 공식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이 보고서에 적었다 "그는 타고난 경관이다. 그는 자신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그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는다. 그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." || [[파일:하인리히 뮐러1.jpg|width=100%]] || || 친위대 여단지도자 뮐러 || 친위대에 들어간 뮐러는 급속하게 지위가 올라갔고 1939년에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. 1939년 9월에 게슈타포와 다른 경찰조직이 국가보안본부에 통합되자 국가보안본부 제4국 게슈타포의 3대 국장이 된 뮐러는 다른 동명의 지도자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훗날 알려지게 될 '''악명높은 게슈타포 뮐러'''로 불리기 시작했다. 그렇게 [[게슈타포]]의 수장이 된 뮐러는 [[1935년]]에 [[독일 공산당]]과 [[독일 사회민주당]]의 하부조직에 침투하여 조직을 파괴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나치정권의 안정화에 큰 공을 세웠고 첩보기관장이던 [[빌헬름 카나리스]] 해군대장과 경합하여 공산주의자 스파이 조직인 붉은 오케스트라에 조직원을 잠입시켜서 거짓 정보를 소련측으로 보내는데 성공하기도 했다.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320px-Bundesarchiv_Bild_183-R98680%2C_Besprechung_Himmler_mit_M%C3%BCller%2C_Heydrich%2C_Nebe%2C_Huber2.jpg|width=100%]] || || 왼쪽부터 '''[[프란츠 요제프 후버]], [[아르투어 네베]], [[하인리히 힘러 ]], [[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]], 하인리히 뮐러. 회의를 하고 있다''' || [[힘러]]와 [[괴벨스]]의 담당분야였던 [[유대인]] 이주 계획에도 깊이 관여하여 [[1939년]]까지 유대인 이주계획 전국본부장으로 일한 뮐러는 유대인의 이주만하다가 유대인 절멸정책 즉, [[홀로코스트]]에 관여하기 시작했다. [[독소전쟁]]이 한창이던 뮐러는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조직하여 1941년 단 1년만에 소련 점령지역의 유대인을 '''무려 140만명'''이나 학살했고 그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상부에 보냈으며.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결정한 1942년의 반제 회의에도 참석했다. 1942년 5월에 프라하에서 직속상관인 [[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]]가 암살당한 사건을 수사하여 암살자 색출에 공적을 세우기도 했지만. 힘이 커졌다고 생각한 힘러, 보어만에게 방해를 받기도 하면서, 정권에서 점차 권한이 축소되었다. 결국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힘러의 라이벌이던 [[마르틴 보어만]]과 손을 잡은 뮐러는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에서 반역 음모자 색출과 체포를 담당했다. 이 때 [[빌헬름 카나리스]]를 포함해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어 약 200명이 처형당했다. 전쟁말기였던 때에도 뮐러는 --이미 추축국의 패배로 끝난 전쟁에서--아직도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여 독일군이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를 탈환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말했다고 한다. 그러나 결국 소련군이 베를린까지 다다르자 뮐러는 히틀러가 있는 총통지하벙커에서 그를 보좌했다. 그러다가 힘러가 무단으로 서방연합국과 화친을 진행하며 히틀러의 뒷통수를 치자 뮐러는 히틀러에게 힘러의 연락장교였던 [[헤르만 페겔라인]]을 체포하고 처형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그를 처형한다.[* 헤르만 페겔라인이 처형당한 날은 1945년 4월 28일인데, 공교롭게도 그 날은 뮐러의 45번째 생일이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